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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역사

28.공민왕의 반원 자주 정책 – 고려 독립을 위한 노력

1. 공민왕의 즉위와 시대적 배경 – 고려 말의 혼란과 개혁의 시작

공민왕(恭愍王, 1330~1374년)은 고려 제31대 왕으로, 1351년(충정왕 3년)에 즉위하였다. 그의 즉위 시기는 고려가 원나라의 간섭을 심하게 받던 시기로, 정치적 혼란과 외세의 압력이 극심했다. 원나라의 세력은 고려 내부에 깊이 뿌리내렸고, 친원 세력은 국정을 장악하고 있었다. 동시에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이 잦아 국가의 방어력이 취약한 상황이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공민왕은 즉위와 동시에 원나라의 간섭을 배제하고 고려의 자주성을 회복하려는 개혁 정책을 추진했다.

공민왕은 즉위 직후 친원 정책을 폐기하고 반원 개혁을 단행하였다. 먼저 원나라의 연호 사용을 중단하고, 친원파로 알려진 기철(奇轍) 등의 세력을 숙청했다. 또한, 고려 왕실의 독립성을 강화하기 위해 정략결혼으로 강요되던 원나라 공주와의 결혼 전통을 단절했다. 이와 같은 조치는 고려가 원나라의 간섭에서 벗어나려는 첫걸음이었다. 그의 개혁 의지는 강했지만, 오랜 세월 동안 원나라와 유착한 세력이 여전히 존재했기 때문에 강한 반발을 초래하기도 했다.

이 시기의 고려는 외세의 영향뿐만 아니라 내부적으로도 부패가 심각했다. 원 간섭기 동안 권문세족(權門勢族)들은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며 토지를 장악하고 백성들을 수탈했다. 이에 공민왕은 강력한 개혁을 통해 권문세족의 세력을 약화하고 국가 체제를 정비하려 했다. 하지만 이러한 개혁은 기득권 세력의 강한 저항을 불러왔고, 결국 공민왕은 정치적 고립을 겪게 된다.

공민왕의 반원 자주 정책 – 고려 독립을 위한 노력

 

2. 공민왕의 반원 자주 정책 – 고려 독립을 위한 노력

공민왕의 중요한 정책 중 하나는 원나라의 간섭에서 벗어나 고려의 자주성을 확립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그는 친원 세력을 대대적으로 숙청하고, 고려의 정치·군사·문화적 독립을 추구했다.

공민왕이 즉위하던 당시 고려는 원나라의 부마국(駙馬國)으로서 독립적인 왕국이라기보다는 원나라의 지방 정부에 가까운 상태였다. 원나라는 고려 왕을 제멋대로 교체할 수 있을 정도로 간섭이 심했다. 그러나 공민왕은 이를 거부하고, 고려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했다.

공민왕은 친원 세력의 핵심이었던 기출과 그 일당을 제거하고, 친원전 행정 체제를 철폐했다. 그는 또한 원나라의 연호 사용을 중단하고, 스스로 독립된 왕국의 군주로서 고려의 자주성을 강조했다. 이러한 정책은 원나라의 반발을 불러일으켰지만, 당시 원나라 내부에서도 정치적 혼란이 가중되고 있었기 때문에 적극적인 대응을 받지는 않았다.

또한, 공민왕은 원나라가 강제로 편입했던 영토(쌍성총관부)를 되찾기 위해 군사 작전을 펼쳤다. 1356년, 그는 최영을 비롯한 장수들을 보내 쌍성총관부를 공격했고, 결국 해당 지역을 고려의 영토로 회복하는 데 성공했다. 이는 고려의 독립을 상징하는 중요한 사건이었으며, 공민왕의 반원 정책이 실질적인 성과를 거둔 사례로 평가된다.

3. 공민왕의 신돈 등용과 개혁 정책 – 권문세족의 견제와 실패

공민왕은 원나라의 간섭에서 벗어나는 데 성공했지만, 여전히 국내 권문세족의 부패와 횡포가 심각한 문제로 남아 있었다. 이에 그는 새로운 인물을 등용하여 개혁을 추진했다. 그중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신돈(辛旽)이다.

신돈은 승려 출신으로, 공민왕의 신임을 받아 국정 개혁을 주도하였다. 그는 권문세족이 불법적으로 장악한 토지를 환수하고, 이를 백성들에게 돌려주는 정책(전민변정도감 설치)을 실시했다. 이는 당시 고려 사회에서 만연했던 토지 문제를 해결하려는 중요한 조치였지만, 권문세족의 강한 반발을 초래했다.

그러나 신돈은 개혁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지나치게 강압적인 태도를 보였고, 점차 독단적인 권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그로 인해 많은 반대 세력이 생겨났으며, 결국 1371년 신돈은 실각하고 처형당했다. 신돈의 몰락 이후 공민왕의 개혁 정책도 급격히 약화하였으며, 다시 권문세족이 득세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공민왕의 개혁이 실패한 가장 큰 원인은 그의 정치적 고립이었다. 그는 기존 세력을 제거하면서도 이를 대체할 강력한 정치 기반을 구축하지 못했다. 또한, 개혁 과정에서 급진적인 방식을 취한 탓에 점점 더 많은 적을 만들었다. 결국 그의 개혁은 단기적인 성과를 거뒀지만, 장기적으로는 성공하지 못했다.

4. 공민왕과 고려의 외교 – 원·명 교체기에 대한 대응

공민왕의 재위 기간 원나라의 쇠퇴와 명나라의 부상이 진행되었다. 이는 고려 외교 정책에 큰 영향을 미쳤다.

공민왕은 원나라의 세력이 약화하자 고려의 독립을 강화하려 했지만, 새롭게 등장한 명나라와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했다. 그는 초기에 명나라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으려 했지만, 원나라와 여전히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려는 세력의 반발로 인해 균형 잡힌 외교 정책을 펼칠 수밖에 없었다.

결국 공민왕은 명나라와 외교 관계를 맺으면서도 원나라의 위협을 완전히 배제하지 못했다. 이는 고려가 강대국들 사이에서 독립성을 유지하기 위한 현실적인 선택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외교적 불안정성은 고려 내부의 정치적 혼란을 가중하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

5. 공민왕의 최후와 고려 정치의 혼란 – 개혁의 끝과 몰락

공민왕은 재위 후반부로 갈수록 정치적으로 고립되었으며, 개혁 실패와 내부 반발로 인해 점차 권력을 잃어갔다. 결국 그는 1374년 측근이었던 홍윤(洪倫)과 일부 반대 세력에 의해 암살당했다.

공민왕의 죽음 이후 고려는 더욱 혼란스러운 시기로 접어들었다. 그의 개혁 정책은 대부분 무산되었으며, 권문세족이 다시 국정을 장악했다. 또한, 이후 고려는 급격히 쇠퇴하며 조선 건국(1392년)으로 이어지는 길을 걷게 되었다.

공민왕은 실패한 개혁 군주로 평가되기도 하지만, 그의 개혁 시도는 고려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그는 고려의 자주성을 회복하고자 했으며, 부패한 지배층을 견제하려 했지만 한계에 부딪혔다. 그의 노력은 실패했지만, 조선 건국 이후 지속된 개혁 정신의 밑거름이 되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크다.